오늘은 나이키 주식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나이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나이키 주식 포스팅
요약
1. 나이키는 1964년 필나이트와 빌 바워만이 블루 리본 스포츠라는 회사를 세운것에서 시작
2. NIKE 라는 이름은 직원의 꿈에서
3. 최초의 로고는 디자인과 여대생이 35$에 제작
4. 마이클 조던과 에어 조던
5. JUST DO IT의 탄생
나이키의 탄생.
필 나이트와 빌 바워만. 블루리본 스포츠
나이키는 1964년 미국 오리건 대학 육상팀 감독 빌 바워만(Bill Bowerman)과 소속 선수
필 나이트(Phil Knight)가 1964년에 블루리본 스포츠(Blue Ribbon Sports)라는 이름의 회사를 차린 데서 시작했다.
1960년 초 오리건 대학의 육상성수 필 나이트와 빌 바우먼은
운동화에 관심이 많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시 독일의 아디다스 운동화가 주류였는데, 무거운 쇠스파이크가 박혀있어 육상선수의 기록에 방해가 되었다.
1964년 필 나이트는 석사 논문에서 일본의 기능성 운동화가 미국 내의 운동화 시장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했고
일본을 찾아가 미국 시장에서 오니츠카 타이거의 운동화 독점 판매권을 획득한다.
필 나이트는 빌 바워만에게 오니츠카 타이거 신발을 보여주며 동업을 제안했고 500달러씩 투자하여
당시 미국에서 치킨 한 마리 가격은 1.5$ 정도. 500$는 지금의 6백만 원 정도.
나이키의 전신 블루리본 스포츠를 설립한다.
맨 처음에는 트럭을 몰고 다니며 소매업자들에게 신발을 팔고 아디다스 판매원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러나 이듬해는 8000 달러 매출을 올리며 대박을 친다.
8000달러는 지금의 10억 정도.
1972년 블루리본 스포츠가 독자적인 제품을 생산하며 일본의 오니츠카 타이거와 관계가 틀어지게 되고,
자체적으로 만든 신발을 새로운 브랜드로 판매해야 했기에, 필 나이트는 나이키를 창립한다.
NIKE 이름의 시작
1972년 새로운 회사명을 생각해 내던 중 필 나이트가 고용한 최초의 직원이자
육상선수 시절 경쟁을 펼쳤던 동료 제프 존슨이 꿈에서 본 이름을 추천했다. 그 이름이 바로 "NIKE " 였다.
승리의 여신 니케의 의미가 필 나이트 마음에 들어 채택하게 되었다.
꿈에서 떠오른 이름으로 회사명을 정했다니, 재밌는 신화 같기도 하고 대충 지은 것 같기도 하고..ㅎㅎ
NIKE 최초의 로고
오니츠카 타이거를 판매하지 못하게 되며 급하게 로고가 필요해진 필 나이트와 빌 바워만은
포틀랜드 주립대 디자인 전공 학생 캐롤린 데이비슨이라는 여대생에게 로고 제작을 부탁했다.
이 사람이 당시에 유명했던 사람은 아니고 그냥 지나가는 디자인과 여대생 정도..
캐롤라인은 당시 여러 로고를 그려갔지만 필 나이트가 다 퇴짜를 놓았고
마지막으로 가져갔던 디자인이 지금의 스우시 로고이다.
스우시 로고조차도 창업자 필 나이트는
"I don't love it, but I think it will grow on me."
완전히 맘에 드는 건 아닌데, 차차 좋아질 것 같네요..
라고 하며 받아 들렸다고 한다. 이후 캐롤라인이 더 로고를 수정하여 가져 갔으나
필 나이트가 이미 기존의 스우시 로고로 생산을 들어갔으며 바꿀 수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맘에 들진 않는데
시간상 채택한 것 같다.
로고 제작자 캐롤라인 데이비슨은 스우시 로고를 육상경기 트랙의 코너 부분을 보고 떠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로고 제작에 대한 비용으로 시급 2$ x 제작에 든 시간 17시간 반을 계산하여
35$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현존하는 거의 최고의 로고를 당시의 40만 원 정도에 팔았으니 배 아플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필 나이트가 1983년 감사의 의미로 나이키 주식 500주 ( 현재 7천만 원 상당. )와
스우시 로고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금반지를 선물했다고 한다.
나이키 최초의 운동화.
1970년 창업자 빌 바워만은 아내가 와플 만드는 모습을 보고, 신발 밑창이 와플 기계 같은 모양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밑창을 와플 기계 모양으로 만들었고 "와플 솔"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팔게 된다.
와플 솔이 적용된 신발을 대학 소속 선수인 스티브 프리폰테인에게 후원하였는데
스티브 프리폰테인은 7개의 중거리 육상경기에서 미국 신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그리고 나이키 신발은 최고의 위치를 다지게 된다.
1979년 나이키 에어쿠셔닝 기술의 시작
1979년 NASA의 직원 프랭크 로디는 나이키에 "두꺼운 재질에 공기를 채워 넣어 밑창으로 쓰는" 지금의 NIKE Air 기술을
제안했고 와플 솔 기술과 에어 기술이 합쳐져 최초의 마라톤화 테일 윈드가 등장하게 된다.
1979년 처음 만들어져서 이름 뒤에 79가 들어가는 것.
테일 윈드는 당시 조깅 열풍과 맞물려 대박을 터트리게 된다.
1982년 에어포스 1의 등장.
1982년에는 에어 기술을 도입한 최초의 농구화 에어포스 1을 발매하게 된다.
그리고 3년 뒤 시카고 불스의 신인 농구선수와 후원 계약을 하게 된다.
전설의 시작. 에어 조던 1 발매. 1985
1985년 계약했던 신인 농구선수는 마이클 조던이었다. 나이키는 조던만을 위한 운동화를 만들어주게 되고,
에어조던을 신고 경기를 누비는 마이클 조던 덕분에 에어 조던은 불티나게 팔리게 된다.
에어로빅으로 온 위기
1980년대 당시 미국에서는 TV 에어로빅 열풍이 일고 있었다. 리복을 비롯한 다양한 신발 회사들은
가벼운 무게를 지닌 에어로빅 신발들을 출시했지만 나이키는 출시하지 않아 시작 점유율이 줄어들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조금씩 경쟁력을 잃어가는 나이키를 위해
광고대행사 위든&케네디는 흥보 캠페인 광고를 하자고 한다.
JUST DO IT의 탄생
이 당시 TV 이슈는 10년 만에 사형제도를 부활시킨 개리 길모어에 대한 내용으로 떠들썩했다.
1976년 무고한 시민 2명을 아무런 이유 없이 살해했던 개리 길모어를 둘러싸고
당시 미국에서는 사형제 폐지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길모어는 법정에서 총살형을 원한다고 밝혔다.
10년씩 사형을 하냐 마냐 결정되지 못한 개리 길모어가 마침내 사형장에 들어가게 되는데,
사형 직전 그가 " Let's do it "이라고 한마디를 한 뒤 사형당하게 된다.
당시 그 한마디가 너무 강렬했는지
개리 길모어의 이름과 그의 마지막 말이 새겨진 티셔츠가 유행을 하고
사람들 사이의 유행이 된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광고대행사 위든&케네디는 "Let's do it"을 조금 변경한 " JUST DO IT"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캠페인을 진행했고 성공시킨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나이키의 가치가 담긴 말이 되었다.
지금까지 나이키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인터넷에 있는 자료들을 참고하고 직접 사진을 찾아서 작성하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삶에는 과거가 물러가고 미래가 열리는 때가 온다.
미지의 것을 마주하기 위해 몸을 돌리는 그 순간이다.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몇몇은 불확실성 속으로 곧장 걸어갈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지 말할 수 없지만 어느 것이 더 재미있는지 말해줄 수 있다.
필 나이트.
아디다스가 주류이던 때에 일본제 저렴한 신발을 팔다가, 세계 최고의 스포츠 의류회사가 된 나이키였다.
'경제 일반 > 시장 Review 기업분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벨로다인 Velodyne ] : 역사 정리. 포드,바이두,니콘,현대모비스의 투자. (0) | 2020.10.10 |
---|---|
넥스트에라 주식 분석 : 신재생 에너지와 함께. 바이든과 함께 (0) | 2020.10.09 |
NIKE 주식 분석 : 나이키 신발보다 나이키 주식. (2) | 2020.10.07 |
듀크 에너지 주가 분석 : 2020.10.06 기사 번역, 앞으로 전망 (0) | 2020.10.06 |
글로벌 파운드리 : 기업 분석. 아부다비 왕가의 오일머니. 7nm 실패 (2) | 2020.10.05 |